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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들

글싹천사 2016. 8. 27. 20:24



성령의 은사들



카리스마타(성령의 은사들)란 용어는 베드로전서 4:10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카리스마(단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구속이나 구원을 의미한다(롬 5:15;6:23).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은사이다(예, 고전 12:28이하). 후자가 이 항목에 해당하는 내용
이다.

   바울로마서 12:6-8, 고린도전서 12:4-11,28-30, 에베소서 4:7-12에서 영적인 은사들에 관해 교훈하고 있다. 영적인(신령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상적인 형태나 비범한 형태로 특별히 나타난 것이었다. 이 영적 은사를 사하는 어떤 사람도  자신은 그 은사를 통하여 도덕적인 신령한 삶을 이룩하지는 못하지만 이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 목적은 언제나 다른 신자들을 교화시키는 것이었다. 영적(신령한) 은사들을 행사하는 것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적 은사들의 사용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실제적인 면은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예외가 없다. 신약 성경에서 영적 은사들은 종종 이적적 은사와 비이적적 은사로 구분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특별한 임무들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은사들은 한편에서는 말씀을 전파하는 은사와 또 한편에서는 실제적인 은사라는 의미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실제적인 은사(혹은 봉사적 은사=역자 주)에 해당하는 것은 다섯 가지가 있다.


   (1)능력(이적) 행함의 은사(고전 12:10,28,29)-이적이란  뒤나메이스(능력들)를 행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뒤나메이스란 악령들을 쫓아내고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가리킨다(8:6-9,13;19:11,12). 이것은 능력 행함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병 고치는 은사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능력 행하는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더 놀라운 것으로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까지도 의미했던 것 같다(행 9:36이하;20:9 이하). 바울 자신도 이 능력 행하는 은사를 행사했지만,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사도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으며(고후 12:12), 또한 그가 전파하는 복음과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권한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롬 15:18이하)


   (2)병 고치는 은사(즉, 신유의 은사, 고전 12:9,28,30)- 이것은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능력(이적) 행하는 은사와 비슷하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사역(마 4:23-24)과 열두 제자(마 10:1)와 칠십인(눅 10:8,9)의 사역에도 나타난다. 또한 병 고치는  은사는 오순절 이후의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행 5:15,16;약 5:14,15참조). 은사들 이라는 복수형은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의 질병들의 다양함과 병을 고치는 데 사용된 수단들의 다양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병 고치는 은사를 행사했던 사람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이 기록한 글들을 통해서 입증되는 사실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 사도 시대 이후에도 몇 세기 동안 계속 교회에서 행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 이 은사는 교회에 있어서 간헐적으로 나타났었다. 오랫동안 병 고치는 은사는 중단되어 왔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 은사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믿는  유력한 교파들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행동은 악평을 받고 있다. 신약 시대에 병 고침을 받은 그병들의 종류와, 신앙의 성격이나 위치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고난이 의미하는 것과, 잠재 의식의 중요성 및  그것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병 고치는 은사와 오늘날 의학과의 관계(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던 사람들 중에는 의사도 한 명 있었다!)는 오늘날에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있다. 병 고치는 은사들(신유의 은사들)은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영구적인 은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성령의 사람, 겸손과 믿음의 사람만이 적절하게 행사할 수 있는 은사인 것이다.


   (3)서로 돕는 은사(고전 12:28)-이 은사는 사도행전 20:35에도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님이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간곡히  권고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권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모범을 보였었다. 초대 교회는  교인들 중에 가난한 자들을 특별히 배려했던 것같고 이러한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장로들의 직책이 다스리는 은사로부터 유래했던 것처럼 집사의 직책과 직무도 돕는 은사에서  유래했던  것같다. 집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이었다.(행 6:1)


   (4)다스리는 은사(고전 12:28;롬 12:8)-교회의 조직은 아직도 유동적이었다.  고정화된 직책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아직 정식으로 임명된 직임자가 교회를  다스리지도 않았다. 따라서 지교회의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이 다스리는 은사를 받아서 지교회의 교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이 다스리는 은사란 교회의 제반 문제들을 지시함에 있어서 건전하게 권고하고 지혜롭게 판단하는  형식으로  시행되었을 것이다. 물론 교회 제반 사항을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반(半) 영구적인 직분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들은 교회에서 정식적인 직분자로  인정되어 일정하게 규정된 직무들을 수행하면서 교회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되어 이들이 그 은사를  자유로이 행사했었다. 이 다스리는 일에 덧붙여서,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들은 지혜와 통찰력을 필요로 할 것이고 다시금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법적으로 규정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5)믿음의 은사(고전 12:9)-이 은사는 아마도 실제적인 신앙 생활과 교회의 확장과 밀접하게 관련된 은사들 속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은사라는 이 영적인 은사들은 당연히 신자들의 신앙을 복돋우어 주었을 것이고, 불신자들에게는 교회에서 전파된 메시지의 진정성을 확증해 주었을 것이다. 믿음의 은사라는 이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능력있는 일들이 이루어졌으며(마 17:19,20), 이를 통하여 신자들은 박해 중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은사들은 교회 생활의 실제적인면과 신자들의 육신적인 번영과 예배 질서나 행실에 관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전파에 관한 성령의 은사들(말씀의 은사=역자 주)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 말씀 전파에 관한 성령의 은사들은 앞에서 기술한 다섯 가지 실제적인 은사, 혹은 봉사의 은사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자도 영적인 은사들임에는 틀림없다. 말씀 전파의 은사들은 그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성령께서 특별한 은사로
주시는 것들이었다.


   (6)사도직의 은사-이 은사는 특히 말씀 전파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랑한다.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고전 12:28). '사도'(해당 항목 참조)라는 칭호는 신약성경에서 열 두제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특히 '바울'에게-적용되었다. 그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주셨던 사도직의 은사를 매우 고귀하게 평가하여 어떤 경우에는 그 사도직 은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었다(참조, 갈 1:12;고전 9:1이하). 사도들은  자기들이  이 신령한 은사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완수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무 것도 그들이 이 중대한 임무(기능)를 완수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행 6:2). 우리가 바울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직의 은사는 주로 불신자들 가운데서 행사되었던 반면에(고전 1:17), 다른 영적인 은사들은 신자들의 필요와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사도직은 이방인들 속에서  완수되었다. 반면에 베드로의 말씀 사역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갈 2:7,8). 분명히 사도직이라는 성령의 은사는 실제로 엄격하게 제한된 어떤 집단, 즉 사도직의 은사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나 권위를 가진 특수한 집단이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기능은 말씀 전파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으나, 그들이 가진 은사는 많은 신령한 은사들 가운데 한 가지 은사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알 수 있다. 교회는 사도들뿐만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터위에 세워진  것이었는데(엡 2:20), 선지자들은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고, 사도들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직의 은사는 신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권위도 역시 그러했었다. 그리고 사도직의 은사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직을 가진 사람이  그  은사를 임의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직임)이 결코 아니었다.  사도들은 그 권위를 민주적으로 행사했었고 권위적으로 행사하지  않았었다(행  15:6,22).
사도들은 교회에 공문을 보낼 때 자기들의 명의로만 보낸 것이  아니었고  지혜롭게도 '장로들'과 '형제들'의 명의를 포함해서 보냈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친히 설립했던 교회로부터 법규를 제정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조차도 자신의 권위를 사도직에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던 것이다.(고전 7:10)


   (7)예언의 은사(선지직의 은사)-바울은 신령한 은사들의 순서에 있어서 사도들  다음에 '선지자들'(예언자들)을 둔다(고전 12:2이하). 예언의 은사(선지직의 은사)는 사도직의 은사와 벌써부터 구별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은사들이 행사되는  영역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민수기 11:29에서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소원했는데 이러한 모세의 소원은 신약 시대의 초대 교회에서 실현되었다(행 2:17,18;19:6;고전 11:4,5). 일반적으로 초대 교회의 전반적인 성도들이 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특히 몇몇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인한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던 것 같다(행 11:28;15:32;21:9,10). 신약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 이러한 선지자들은 종종 지교회들을 순회하는 설교자이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신자들을 믿음 위에 굳게 세웠던 것이다. 그들의 사역은 아마도 자발적이었다는 점과 권능이 있었다는 점이  그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역 가운데는 계시를 말하는 것이 포함되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고전 14:6,26,30,31).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선지자가 계시를 말한다는 것은 방언을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리시고(행 13:1이하), 미래의  사건을 예언케 하기도 하시지만(행 11:28;21:10,11), 선지자의 특별한 은사는 지교회의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고 위로하고 교훈하는 것이다(고전 14장). 속 사도  시대까지는 아직도 선지자가 지교회의 교역자(목사)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었으나, 얼마 못  되어서 예언의 은사를 가졌던 선지자의 권한은 지교회의 교역자(목사)에게로 위임되어서 지교회의 교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지교회의 교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8)영 분별의 은사(고전 12:10)-예언의 은사에는 그 성격상 언제나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게 그 선지자들의 예언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이러한 능력은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어떤 통찰력이나 예리한 판단력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은사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 영적인 은사를  '영  분별의 은사'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사실 참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은 겉모양만 보아서는 거의 분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예언을 멸시치 말고 모든 것을 헤아리라고 했다(살전 5:20,21). 영 분별의 은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지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서 계시를 말하노라고 할 때 신자들은 그 예언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분별했던  것이다.(고전 14:29)


   (9)가르치는 은사(교사직의 은사:고전 12:28,29;롬 12,7)-이 가르치는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지만, 분명히 그것과는 구별되는 은사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설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사는 그 선지자가 선포한 것을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고, 체계적으로 교리화하며, 그 교회가 처한 상황에 맞게 적용시켜서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교사들은 조직적으로 체계를 통해서 각 지교회들을 교육했던 것 같다.(딤후 2:2)


   (10)권위(勸慰)하는 은사(롬 12:8)-이 은사는 예언의 은사나 가르치는 은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권위하는(권면하는) 은사가 그것들과 다른 점은 이 은사가 신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들보다도 더 개인적(개별적)이라는 점이다. 만일 이 권위하는 일이 성공적인 것이 되려면, 권위하는 자는 사랑과 이해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설득력있게 신자를 대해야 한다. 권위하는 일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더  고상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과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더욱 깊이 헌신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신 '권면'(exhortation:해당 항목 참조)의 은사란 영적인 설득력과 감화력을 가리킨다.


   (11)지혜의 말씀을 말하는 은사(고전 12:8)-이 은사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령님께서 주신 하나의 중요한 은사이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깊은 것들(롬 11:33)을  깨닫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일들과 말씀들의 대부분은 신비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에, 일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을 그리스도인  각자의 상황에 투사해 볼 수 있는 어떤 말씀이 종종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하여 이 임무를 성취하도록 성령을 통해서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 계시에 대한 감각과 예리한 통찰력 때문에 이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흡사하다.


   (12)지식의 말씀을 말하는 은사(고전 12:8)-이 은사는 오랫동안 주의깊게  연구한 후에 지식적인 말씀을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지식의 말씀이란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교사,선생)이 일상적으로 가르치는 말을 뜻한다. 물론 교사들의 지적인 활동은  교인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는데, 여기서 가리키는 요점은 성령께서 특별한 사람(교사)에게 주시는 지식과 깨달음과 통찰력과 같은 것으로서  직관(直觀)이라고도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지적하기를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모두 성령을  통하여(혹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강조점은 성령님께 그 말씀을 받는다는데 있고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13)방언의 은사(고전 12:10,28,30;14장)-이것은 바울이 언급한 또 하나의  영적인 은사인데 성령께서는 각종 방언을 주신다고 했다(고전 12:10,28). 이  은사의  성격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잘 설명되어 있다. 즉 1)이 방언이라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듣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나 어떤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고전 14:2-4). 2)이 방언(글로싸)이란 외국어(포네,10-12절)가 아니었다. 3)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보통 기도와 찬양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14-17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4절). 5)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지적인  규제를 초월해 버리며(14,15절), 그 단어들이 고도로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고도로 축약되어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성이 비상하며, 황홀경에서 구사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교회의 역사상 간혹 발생되었던 영적인 각성 시기에 나타났던 방언과  유사하다.


   (14)방언 통역의 은사(고전 12:10,30)-마치 어떤 선지자가 계시를 말하는 데  대해서 영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듯이, 방언을 말하는 데 있어서도 이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을 자신이 직접  통역(해석)하기도 했다(고전 14:13). 그러나  보통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통역(해석)했다(고전14:26-28;12:10). 그런데 바울고린도전서 14:13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 충고는 매우 흥미롭다. 이는 황홀경에서 구사되는 의미없는 말들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라는 말인데 이는 마치 예술 비평가가 연극이나 교향악이나 그림을 초보자에게 해석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물론 방언 통역(해석)하는 것은  초자연
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고전 14:13)


   바울그리스도인들을 교훈하면서 은사들의 실제적인(실용적인)면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강조하기를 성령께서 그의 은사들을 주신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교인들의 덕성을 계발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적인 결실을 맺게 하고, 교회에 봉사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신령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중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령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희생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더 극적인 은사들(방언, 신유, 이적)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무분별한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필요했었다(고전 14:40). 예컨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에게 제재를 받아야 했다(32절). 또한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위에서 말한 극적인 은사들(놀라운 은사들)은 신자들에게 믿음과 덕성을 깨우쳐 주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은사들보다 더 하위에 속한 은사들이라고 했다.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되지만(39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여 신앙과 덕성을 일깨워 주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은사들의 상대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데 사용될 기준은 교리적인 것(고전 12:3)과 도덕적인 것(고전 13장)과 실용적인 것(고전 14장)이었다.
   문제는 어느 점에서 그 균형을 맞추느냐는 것이었다. 아주 위험한 것은 은사들로부터 유래된 직임들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그와 관련된 은사들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불가피하게 제도적 교회주의로 흐르게 되어, 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그 권능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