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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설날 널뛰기의 축제 문화적 유래

글싹천사 2014. 1. 29. 14:31

 


- 오두의 문화비평 -

 

설날 널뛰기의 축제 문화적 유래:

- 적의 두개골 위에 관뚜껑 올려 밟은데서 기원 -

 

 

 

"과세는 잘 세었나"

 

이 말은 설날 인사의 기본형이다. 지난 한 해는 제대로 잘 보냈는가라는 뜻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진 미래형 인사다. 우리 조상들은 새해 한해에 대한 덕담으로 왜 지난 한 해에 대하여 더 신경을 썼을까?

 

"과세 잘 세기"의 '세다'는 것은 보낸다는 뜻이다. 과세를 잘 세지 못하면 눈썹이 센다는 것처럼 희게 세어버린다는 것으로 늙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한 해를 제대로 잘 늙었는가 하는 의미가 있다.

 

2012년 바야흐로 음력 설날을 맞이했다. 설이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의미도 있지만, 과거의 묵은 때를 벗는다는 의미도 있다.

 

말이 묵은 때이지 지난 한 해의 추악한 기억을 씻어내고자 한 뜻이 우리 조상들에게서 '설'이라는 새해 첫 명절의 진정한 주제였다.

 

이 글은 설날이 가지는 과거의 묵은 때를 어떻게 우리 조상들은 벗고자 했는지를 널뛰기 기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금은 살벌한 내용일 수도 있으나 필자의 이 글은 설날과 그 문화인류학적인 배경에 대한 전에 보지 못하는 근원적인 새 해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이 될 것이다.

 

흔히들 새해 명절인 설에 대하여 덕담으로 대표되는 희망의 미래적인 좋은 의미로만 해석해 왔다. 그러나 고대 인류들은 지난 한 해를 보내는 것은 지난 한 해의 '악몽'을 잊어버리는 것이 더 심각한 주제였다. 미개한 시대에 정신적 물리적인 생활에서 지난 한 해 동안 벼라별 악독한 사건들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널뛰기 유래에 대한 기존 개념들은 조선시대 유부녀들이 담장 너머 바깥 세상을 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뒷시대에 갖다붙인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엔 부녀자들이 단오날 그네뛰기는 물론 산과 들을 다니면서 곡우물을 먹으러 가거나 화전을 해먹는 삼짓날 자유 산 나들이 등에서 얼마든지 담밖을 나오는 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널뛰기의 본래의 유래는 상당히 오싹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널은 시신을 담는 관(棺)을 일컫는다. 왜 널 즉 관짝을 뛰었을까?

 

널뛰기를 한자 표기로는 도판희(跳板戱) 초판희(超板戱), 판무(板舞)라고도 썼다. 조선 순조(純祖) 때 이낙하(李洛下)가 지은 《답판사(踏板詞)》에는 널뛰기를 육답판 놀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널뛰기'라는 말로 사용했다.

 

널뛰기의 역사는 목조 관을 사용하던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널뛰기를 언급한 정조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세시 원일조>에는 널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항간에서 부녀자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를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 생각건대 청(淸)나라 주황의 《유구국기략》에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板舞)라 한다‘고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 조선 초에 유구(琉球)가 입조(入朝)할 때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아 간 것인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조선시대 중반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 즉 류큐[琉球]에도 ‘판무희(板舞戯)’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풍속이 고려시대 삼별초 무리들이 오키나와로 간 결과로 보인다.

 

위의 기록을 보면 널뛰기의 기원이 '항간에 전해오는' 내용으로 기록하여 그 분명한 역사적 연원은 고려시대 이전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풍속편〉에서 널뛰기는 “기마격구도 자유롭게 하던 우리 여성 고쇄기 이전의 고유한 민속”이라고 쓰고 있다.

 

널뛰기 풍속의 주요 시기는 설날 전후라는데서 지난 한 해의 과세(過歲)에 대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2월조>에는 섣달에 시작하여 널뛰기를 정월초까지 한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의식으로 널뛰기를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 동양 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세기말

 

그렇다면 한 해를 보내면서 왜 널뛰기를 행했을까?  

 

널뛰기에서 '널'이라는 앞서 언급한대로 사람의 시신을 담는 관(棺, 널 관자)의 우리 말이다. 왜 이런 말이 남아 세시풍속 특히 한 해의 시작인 설날의 풍속으로 널뛰기로 남아 있을까?

 

널뛰기란 본래 적을 벌주는 축제의 한 과정으로 널을 밟는(跳) 행위로 출발했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뛴다는 도(跳)는 밟는다는 도(蹈)와 같은 도이다. 옛 조상들에게서 신은 모시는 신이 있었고 밟아버려야 하는 신이 있었다.

 

지신밟기라는 말은 나쁜 신을 물리치려 지신을 밟는 의식이었다. 푸닥거리에서도 '잡귀잡신은 물 아래로!"라는 주문을 외운다. 무속에서 기본 용어는 모신다가 아니라 '쫓는다'는 개념이 강했다. 그 쫓아내는 위협은 '밟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무당의 '작두타기'도 사실은 밟아버리는 무당의 발은 작두도 무섭지 않으니 냉큼 물러가라는 귀신 쫓아보내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당이 귀신을 밟고 작두 위에서 뛰는 것처럼 시위를 하는 의미가 도판희(跳板戱) 즉 널뛰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미친년 널뛰듯 하다'라는 말도 널뛰기가 가지는 무속적인 배경을 짐작하게 해주는 표현이다. 작두타는 무당이 여성이듯이 널뛰기가 여성들의 축제가 된 배경은 그래서 귀신을 밟는 무속적 의미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설날 널뛰기가 무속적인 배경에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축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적인 고대사회의 축제 제전은 신앞에 바치는 제전과 적을 이겼을 때의 축제 두 가지가 가장 큰 제전의 배경이었다.

 

추석 즉 한가위는 흔히 풍년 축제로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추석의 진짜 역사적 배경은 흥미롭게도 발해와 전쟁해서 이긴 신라인들의 축제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면서 9년(838∼847)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남긴 일본승려 엔닌(圓仁)기록에 남아 있다. 한가위가 신라 발해 갈등 관계 이전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겠으나 엔닌은 그의 여행기에서 한가위 축제 자체가 발해와의 승전의 축제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카니발이라는 말은 오늘날 축제의 의미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제전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풍습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 카니발이었다.

 

축배라는 것이 있다. 축배는 본래 전쟁에서 이기면 적장의 두개골에 술을 담아 마신 것에서 그 기원에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축배란 적장의 두개골에 술을 담아 자신들의 신 앞에 바치면서 마신 의식이었다.

 

아즈텍인디안들이 태양신 앞에 인신제물의 피를 잔에 담아 바치고 그 피를 마셨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즈텍인들의 태양신은 그들의 조상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고대 인류의 신은 조상신과 자연신의 조합적 개념을 가졌다. 조상신은 유교에서 남아 있고 조상에게 술을 바치고 그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것을 음복이라고 한다. 유교에서 풍수명당에 조상을 묻었다는 것은 자연 대지의 어머니와 일체화시킨 의미인 조상신 + 자연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제사할 때 음복(飮福)은 복을 비는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본래의 음복은 복수를 했다는 제의적인 제사를 조상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적의 두개골을 가지고 무속적 제의 의식을 행한 역사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빌로니아시대의 탈무드 시대(Talmudic era) 때에 유대인들에게도 두개골 세리머니가 존재했다. 영국의 사우스햄프톤 대학 연구원 댄 레빈(Dan Levene)씨는 아람어가 새겨진 인간 두개골을 발굴하여 그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을 귀신이나 악마로부터 치유하기 위하여 '주문 바가지(Incantation bowls)'라는 두개골 부적(符籍)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the talisman was likely used by someone desperate, and that there have been past cases of skulls being used to ward off increased ghosts or demons."

 

이러한 주문바가지는 유대민족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같은 문화가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병마에 시달리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병마는 악귀의 장난으로 보았으며 그 악귀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많은 마술적인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다.  

 

"To combat demons - who cause medical problems as well as other mishaps and ills - people invoked numerous magic rites and formulas."

http://www.haaretz.com/news/ancient-jews-used-skulls-in-ceremonies-despite-ban-1.274052

 

인간의 두개골을 마시는 잔으로 사용한 역사는 유라시아인들의 초원지대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풍속이었다. 가장 오래된 두개골 잔은 기원전 14,700년 전의 것으로 영국의 소머세트(Somerset) 지역의 고흐 동굴(Gough's Cave)에서 발굴된 것이다.

 

*영국 고흐 동굴(Gough's Cave)에서 발굴된 두개골 술잔

 

헤로도투스(484 – 425 BC)의 기록에는 스키타이인들은 적의 두개골을 눈썹부위 정도에서 잘라 가죽으로 밖을 싸고 안쪽은 금박을 입혀 잔으로 사용했다고 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적을 처음 죽이면 적의 피를  두개골에 담아 마셨다는 것이다.

 

중국의 <漢書>의 기록에는 두개골 잔(skull cup)의 전통에 대하여 흉노족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BC 177년 노상선우(老上單于)는 월지(月氏)왕을 죽여 그의 두개골로 술을 따라 마셨다는 것은 유명하다. 

 

바이블 사사기 9장에는 아비멜렉이 한 여인이 던진 멧돌에 두개골이 부서져 죽는 내용이 나온다. 다분히 그 시대의 두개골에 대한 무속적인 의미로 읽혀진다. 메두사 이미지에 머리에 뱀들이 우글거리는 것으로 본 것 또한 두개골이 가지는 그 악마적 해석의 한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1510년 사흐 이스마일 1세(Shah Ismail I)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었던 샤이바니드 제국의 무하마드 샤이바니(Muhamad Shybani)를 죽여 그 신체는 찢어 전국에 보내 전시하게 했으며 그 두개골은 금박을 입히고 보석을 장식해서 술잔으로 만들었다.

 

중세인 9세기 때의 비잔틴 황제 니세포로스 1세(Nicephorus I)도 적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시인 로드 바이론(Lord Byron)이 그의 시에 두개골 술잔에 대하여 쓰기도 했다.

 

인도와 티벳에서 두개골 잔은 카팔라(Kapala)로 알려져 있는데 탄트릭 불교와 힌두교의 의식에서 사용되었다. 다만 이 경우 적의 해골은 아니었다. 힌두교 신인 칼리는 때로 피를 가득 담은 카팔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칼리 신의 그런 모습을 일부 보여준 바 있다.

 

 

티벳에서 라마승의 두개골 문화 전통은 그 이전 토속종교인 본(Bon) 종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개골을 말린 뒤에 잘 다듬어져 의식용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It's done all over Tibet with lama skulls, a holdover from the pre-Buddhist Bon religion. Human skulls are dried, carved, and used as ritual bowls.)

 

일본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자이와 아사쿠라 가문을 정벌했을 때에 아자이 나가마사와 그의 아들들의 두개골을 취하여 사케 술잔(오초코)를 만들어 그의 부하들에게 건배를 하고 사케를 나눠 마셨다.

 

적의 두개골로 잔을 만들어 마신 것과 더불어 적의 두개골을 부셔트리는 의식 또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골 부셔트리기는 상징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새해 첫날 바가지를 밟아 부셔트리는 우리민족의 전통은 두개골 대신에 바가지를 밟아 심리적인 극복의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바가지인 줄 알고 마신 두개골 이야기는 실제 경험 이야기보다 그 시대의 당나라 문화를 두개골에 피를 나눠마시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 시대의 풍속에 연관한 적의 두개골로 그 피를 마시는 것이나 바가지로 물을 마시는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를 보여주는 의미임을 추측케 한다.

 

장례식 때 시신이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옮길 때에 문지방에 놓인 바가지를 깨고 넘어갔다. 혼인 때도 신부의 가마가 신랑집 대문을 넘을 때나 신랑이 신부집에 청혼을 하러 대문에 들어갈 때에도 바가지를 밟아 깨고 넘어 갔다.

 

두개골을 밟아 깨는 방법의 약식으로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날에 미운 사람의 해골 대신에 박을 밟아 부수는 풍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정월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밟아 깨는 풍속은 딱딱한 부럼깨는 풍속에 이어져 있다. 모두 딱딱한 두개골 깨는 것의 상징적인 행위이라 할 수 있다.

 

전통 삼신 단지는 바가지에 쌀을 담아 안방에 모셨다. 바가지 안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두개골 안에 그 사람의 신이 존재한다고 본 것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바가지는 탈을 만드는 재료였다. 박은 탈과 같은 의미였다. 박을 밟아 깬다는 것은 탈 즉 상대의 두개골을 밟아 깬다는 의미이다.

 

<흥부전>에서 박 속에서 도깨비가 나온다는 것은 박 속에서 좋은 귀신도 나오고 나쁜 귀신도 나온다는 의미로 바가지는 두개골의 대신 역할을 한 것이다. 바가지로 탈을 만들어 탈춤놀이를 한 것은 그 바가지 탈이 의미하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제의적인 행위였던것이다.   

 

이런 선이해를 가지고 다시 널뛰기로 돌아가보자.

 

적의 해골을 지푸라기(나중 시대에는 가마니)에 싸서 널의 중간 아래에 놓고 그 위에 칠성판을 올려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뛰어 밟은 행위가 이른바 널뛰기였다.

 

야사에 의하면 장희빈의 악독함을 벌하고자 숙종은 장희빈을 대궐 대문짝을 뜯어 그 위 아래 사이에 넣고 궁녀들에게 그 위에 올라가 뛰게 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널뛰기가 본래는 원수에 대한 앙갚음 의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엘지자베스 키스의 Old Korea(1919)의 널뛰기 그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던 옛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적의 두개골을 부수거나 그 두개골로 무속적인 제의를 행해야 다시는 적으로부터 당하지 않는다는 미신을 믿었다.

 

널뛰기 풍속의 배경을 찾아보면 처녀 시절에 널을 뛰지 않으면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적의 두개골을 부서셔트려야 그것이 액땜이 되어 새로운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초에 널뛰기를 하면 한 해 동안 가시에 찔리지 않는다는 미신도 있었다. 맨발로 다니던 시절 발바닥을 튼튼히 해야 가시에 찔리지 않게 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축구(축국)의 기원도 사실은 적의 두개골을 차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두개골 차기는 적의 인간 오줌보를 차던 것으로 전이되기도 하고 적의 살가죽으로 짚푸라기를 말아 싼 공을 차기도 했다.  

 

아마존 강 지역에서 적의 두개골을 작게 수축시켜 무속적 의식으로 사용하는 shrunken head 의식도 있었다. 두개골을 수축시켜 만든 이러한 수축된 두개골(shrunken head)은 승리의 전승 트로피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널뛰기 문화는 다시 말하여 관뚜껑 뛰기이다. 관 안의 적의 두개골을 꺼내 놓고 관뚜껑을 그 위에 올려 놓아 널을 뛰게 했하여 승리의 축제를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러한 승전의 축제의식은 순전히 놀이로서만 남아진 것이다.

 

이러한 널뛰기 문화의 변천처럼 인문이 발달되지 못하던 시대의 전쟁 풍속들이 시대를 달리하면서 좋은 뜻으로 전환시킨 죽제 문화로 남아진 경우들이 많이 있다.

 

설날 떡국을 만들기 위해서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떡메치기를 하는 유래 또한 적을 메치는 잠재의식을 유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떡은 먹는 의미 이전에 죽음을 제사하는 의미가 보다 큰 의미로 여겨졌다. '떡을 친다'라는 말은 욕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널뛰기의 역사 문화적 배경은 그래서 좀더 원시 전쟁문화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에게 설날은 특히 지난 한 해의 잊고싶어했던 잡귀들의 사연들을 잊어버리는 의식이 섣달 그믐밤을 보내면서 다음날 새해 설날로 새출발을 삼고자 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 널뛰기 풍속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설'이란 새로운 새해 맞이 이미보다 지난 한 해의 정리의 의미로 시작된 명절이었다. 설날은 사실은 그믐밤 축제이다. 한 해의 새로운 출발인 그믐밤을 보내는 것이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그믐밤에 잠들면 눈썹이 센다는 것이 설날의 기본적인 축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설날이란 그믐밤 축제를 보낸 '다음 날'로서의 새로운 날을 의미하고 있다. 설의 개념은 지난 한 해의 마지막 정리 축제였던 것이다.

 

적의 해골을 그의 칠성판 널로 뛰는 이러한 널뛰기 유래 해석은 그래서 과거 우리 조상들의 섣달 그믐밤과 그 다음날의 설의 의미의 먼 유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로 재해석하면 널뛰기 풍속의 의미란 지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서는 새해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겠다.

 

새해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는 해이다. 기존 정권의 잘못된 사항들에 대하여 확실히 깨부시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설날의 의미일 것이다. '널뛰기'는 그런 면에서 과거는 묻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2012년 음력 설날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net

 

 

 

 *관련글 보기: <신화이야기 184> 빼빼로데이 유래와 홀수 달 청춘명절들의 의미